9일(현지시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영화 '기생충'으로 4관왕에 오른 봉준호 감독. [AP=연합뉴스]
봉준호 감독의 수상 소감은 아카데미에서도 빛났다. 9일(현지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LA) 할리우드 돌비극장에서 열린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영화 ‘기생충’으로 4관왕을 차지하면서 오스카를 ‘진짜 국제영화제’로 만들었다. 지난해 10월 북미 개봉을 앞두고 “오스카는 국제영화제가 아니라 그저 ‘로컬(지역)’ 영화제”라며 백인ㆍ남성ㆍ자국 영화 중심의 보수적인 오스카를 비판했던 그가 스스로 그 한계를 깨부순 셈이다.
이날 그가 쏟아낸 수상 소감도한 편의 영화처럼 기승전결을 이뤘다. ‘기생충’ 속 명대사 “너는 계획이 다 있구나”란 소리가 절로 나올 정도로 꼭 필요한 메시지를 적재적소에 배치한 것. 가장 먼저 각본상을 받은 그는 “땡큐, 그레이트 오너(감사합니다, 큰 영광입니다)”라고 말문을 열었다. 공동집필한 한진원 작가와 함께 무대에 오른 봉 감독은 “국가를 대표해서 시나리오를 쓰는 건 아니지만 이건 한국의 첫 오스카상”이라며 “저희 대사를 멋지게 화면에 옮겨준 배우들에게 감사드린다”고 덧붙였다.
“너는 다 계획이 있구나” 기생충 명언의 시작
트위터 등 SNS에서 화제가 된 봉준호 밈. [연합뉴스]
한진원 작가와 봉준호 감독이 각본상 트로피를 들고 있다. [AFP=연합뉴스]
국제영화상을 받기 위해 다시 무대에 오른 봉 감독은 “부문 이름이 올해부터 외국어영화상에서 국제영화상으로 바뀌었는데 그 첫 번째 상을 받게 돼서 더더욱 의미가 깊다”며 “그 이름이 상징하는 바가 있는데 오스카가 추구하는 방향에 지지와 박수를 보낸다”고 밝혔다. 그가 영어로 덧붙인 “오늘 밤 술 마실 준비가 됐다(I‘m ready to drink tonight)”는 그대로 밈(meme)이 되어 온라인상에 퍼져나갔다. 한국 영화 최초로 오스카의 장벽을 허문 기쁨을 모두가 함께 나눈 것이다.
수상 확률이 높지 않았던 감독상에서도 봉준호의 이름이 호명되자 깜짝 놀란 듯했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무대에 선 봉 감독이 “국제영화상 수상하고 내 할 일은 끝났구나 했는데 너무 감사하다”고 말하자 객석에서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는 “어릴 적부터 영화를 공부하며 가슴에 새겼던 말이 있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란 말인데 그 말을 한 분이 바로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이라고 밝혔다.
작품상 수상에 기뻐하는 봉준호 감독과 조여정, 송강호 등 출연 배우들. [로이터=연합뉴스]
봉준호는 ‘아이리시맨’으로 9번째 감독상 후보에 오른 스코세이지를 가리키며 박수를 보냈다. 덕분에 스코세이지로서는 2007년 수상한 ‘디파티드’를 제외하고는 8번째 불발에 그쳤지만 노장을 향한 기립박수가 쏟아졌다. 봉준호는 “마티(애칭) 영화를 보며 공부했는데 같이 후보에 오른 것만으로도 너무 영광”이라고 애정을 표시한 데 이어 “제 영화가 미국에서 잘 알려지지 않았을 때부터 항상 좋아하는 작품 리스트에 뽑아주고 많은 분에게 추천해준 쿠엔틴 형님, 사랑한다”라고 인사를 건넸다.
“마티, 쿠엔틴 형님, 샘, 토드 모두 멋진 감독”
‘원스 어폰 어 타임...인 할리우드’로 함께 후보에 오른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은 물론 수상이 유력했던 ‘1917’의 샘 멘데스 감독, ‘조커’의 토드 필립스 감독 등을 치켜세우는 것도 잊지 않았다. 봉준호는 “샘이나 토드 모두 멋진 감독”이라며 “오스카에서 허락한다면 이 트로피를 텍사스 전기톱으로 잘라서 다섯개로 나누고 싶은 마음”이라고 말했다. 마치 전편에서 이어지는 후속편처럼 “감사하다. 나는 내일 아침까지 마실 것(I will drink until the next morning)”이라고 수상 소감을 마무리하자 객석에서는 연신 폭소가 터져 나왔다.
작품상 트로피로 술마시는 시늉을 하는 곽신애 대표와 봉준호 감독. [EPA=연합뉴스]
배우 및 스태프를 일일이 챙기는 배려심도 돋보였다. ‘기생충’이 작품상을 받으며 오스카의 대미를 장식했지만 봉준호는 제작사 바른손이앤에이곽신애 대표와 투자배급사 CJ 이미경 부회장에게 마이크를 양보했다. “지금 이 순간 굉장히 의미 있고 상징적인 시의적절한 역사가 쓰이는 기분이 든다”는 곽 대표의 수상 소감처럼 모두가 함께 만들어온 역사임을 분명히 한 것. 송강호ㆍ이선균ㆍ조여정ㆍ최우식ㆍ박소담ㆍ이정은ㆍ장혜진ㆍ박명훈 등 주연배우 8명의 이름을 고루 호명하며 누구 하나 소외되지 않도록 했다.
시상식이 끝나고 진행된 기자회견에서도 명언이 쏟아졌다. 취재진이 4관왕에 오른 비결을 묻자 봉준호는 “내가 원래 좀 이상한 사람이라 평소 하던 대로 했다. 곽신애 대표나 한진원 작가도 다 평소 하던 대로 했을 뿐인데 이렇게 놀라운 결과가 있어서 아직도 얼떨떨하다”고 답했다. 아카데미 시상식에 후보로 올랐을 당시 “지금이 ‘인셉션’처럼 느껴진다. 나는 곧 깨어나서 이게 꿈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라고 소감을 밝혔던 그는 트로피로 머리를 치는 시늉을 하며 “지금도 이렇게 하면 꿈에서 깰 것 같은 느낌”이라고 덧붙였다.
“이미 장벽들은 부서지고 있다. 구획 나눌 필요 없어”
지난달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외국어영화상을 받으며 말한 “1인치 정도 되는 자막의 장벽을 뛰어넘으면 훨씬 더 많은 영화를 즐길 수 있다”며 “우리는 단 하나의 언어를 쓴다. 그 언어는 영화”라는 수상 소감은 외신에서도 두고두고 회자되고 있다. 오스카를 휩쓴 그는 “어떻게 보면 이미 장벽들이 부서지고 있는 상태였는데 때늦은 소감이 아니었나 싶다”며 “이제는 외국어(비영어) 영화가 이런 큰 상을 받는 것이 사건으로 취급되지도 않을 것 같다. 모든 게 자연스러워지는 날이 올 것”이라고 말했다.
기뻐하는 송강호, 이선균, 최우식, 장혜진, 봉준호 감독, 박소담, 박명훈, 조여정. [뉴스1]
영향을 받은 아시아 감독, 아시아 영화에 미치는 영향 등 지역에 포커스를 맞춘 질문이 쏟아지자 그는 또 하나의 명언을 남겼다. “한국영화의 대가인 김기영 감독을 비롯해 이마무라 쇼헤이, 구로사와 기요시 같은 일본 감독, 대만 뉴웨이브를 이끈 후샤오시엔, 에드워드 양 등 너무도 많다”며 8일 필름 인디펜던트 스피릿 어워드에서 ‘더 페어웰’로 작품상을 받은 중국계 미국인 룰루 왕 감독에게도 축하 인사를 건넸다.
“아시아다, 유럽이다, 미국이다 그런 경계를 우리가 꼭 구획을 나눠서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각각의 작품이 가진 매력과 호소력이 있다면 구분하는 것조차 의미가 없어졌어요. 우리는 영화의 아름다움 자체를 추구하고 있으니까요. 저나 룰루 왕 모두 그저 영화를 만들 뿐입니다. 그건 모두 똑같아요.”
지난해 5월 칸 영화제에서 “영화감독을 꿈꾸던 소심하고 어수룩한 12살 소년이 황금종려상 트로피를 만지게 되다니”라고 시작한 봉준호 감독의 어록은 어디까지일까. “한국영화의 가장 창의적인 기생충이 돼 한국영화 산업에 영원히 기생하는 창작자가 되겠다”(지난해 11월 청룡영화상)고 다짐한 그는 앞으로도 “다 계획이 있다”고 했다. 그는 “오스카나 칸에서 상을 받기 전에 준비하고 있던 작품이 두 편 있다. 하나는 한국어, 하나는 영어로 시나리오를 쓰고 있다”며 “이 상으로 인해 뭔가 바뀌진 않을 것. 20년간 계속 일해온 것처럼 일할 것”이라고 밝혔다.
민경원 기자 storym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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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2-10 09:43:48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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